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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나잇 베이킹 [녹차 바움쿠헨]있어빌리티 라이프/나 이거 만들 줄 알아 2020. 2. 9. 19:55
나는 뭔가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좋아한다.
뭔가 예상치 못한 이벤트에서 오는 당혹감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성격이라, 어떻게든 의미를 부여해서 자체해석하는 스타일이다.(내가 지금 여친이 없는 것에는 말이야 다 '으ㅡ미'가 있단 말이야)
이러한 연유로, 나는 무언가를 착수하기 전에 의미를 부여할 만한 '무언가'를 하곤 하는 강박 아닌 강박이 있다.
이 이야기는 입대 5시간 전 뜬금없이 케이크를 구운 이야기다.
녹차 바움쿠헨
Green tea Baumkuchen
이유는 거창하지 않았다.
그냥 입대 전 이러저러 생각이 많았고 잠도 오지 않았다.
째깍 째깍 야속한 시간은 흘러가고, 그 순간 순간이 너무도 아까웠다.
몇 시간만 있으면 나는 사회에서 벗어나 철저히 통제된 삶으로 들어간다.
새삼 내게 주어진 자유가 너무도 눈물나게 소중하게 느껴질 무렵, 이 마지막 자유를 몬가... 몬가 의미있는 일로 마무리하고 싶어졌다.
입영심사대로 출발하기 1시간 전.jpg
Ingredient
아몬드가루 30g 설탕 15g 달걀흰자 30g 무염버터 165g 꿀 80g 소금 조금 달걀노른자 75g 바닐라익스트랙 2g 박력분 120g 옥수수전분 60g 베이킹파우더 3g 머랭 (달걀흰자 140g + 설탕 75g) 녹차파우더 3g 생크림 15g 녹인 화이트 초콜릿 60g
레시피 출처: Cooking tree 쿠킹트리 https://youtu.be/63IwczZ-oyU
홈베이킹에 빠져서 여러 요리 유튜브 채널을 눈팅하던 중, 쿠킹트리님 채널에서 '와 이거 짱 예쁘다 이거 만들면 좀 있어보이겠는데' 싶어 재료만 사두고 쟁여놓은 채 엄두를 못 냈었던 녹차 바움쿠헨.
시간도 많겠다, 멋도 있겠다. 얘로 결정.
아몬드가루, 달걀흰자, (내 맨탈마냥 말랑해진)실온 무염버터 등 재료들을 섞다보니 착잡하던 마음은 좀 잦아든다. 이것 저것 넣고 쓰까쓰까하다 보면, 이런 토사물같은게 과연 이뻐질까 싶으면서도 그 결과를 상상하면서 기대감에 부풀어오른다.
내 군생활은 과연 어떨까. 머리털 나고 단 한번도 이런 이상한 집단에서 살아본 경험은 전무한데.
우락부락한 남정네들 사이에서 순둥순둥 순두부같은 내 멘탈을 잘 보전할 수 있을까... 내가 적응할 수 있을까...
싶으면서도
작대기 4개 달린 약장 붙이고 당당하게 전역하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마음은 점점 울렁거린다.
녹차 바움쿠헨은 초록 노랑 초록 노랑이 층층히 나타나는 모습이 포인트. 미리 녹차가루로 색을 낸 반죽과, 그렇지 않은 노란 반죽으로 나눠둔다.
반죽을 넓적한 사각팬에 얇게 펴 바르고 예열한 오븐에 넣고 굽는다. 노랑 반죽이 구워졌으면, 꺼내서 그 위에 초록 반죽을 펴 바르고 다시 굽는다. 잠시 후 다시 꺼내서 노랑 반죽을 올리고, 또 다시 굽고.
밑이 많이 타기는 했지만 층이 제법 뚜렷하게 나왔다. 나이수 이게, 계속 굽다 보면 맨 처음 펴발랐던 반죽은 계속 열을 받아서 쉽게 타버린다. 반죽을 골고루 균일하게 펴바르지 않으면 층도 울퉁불퉁하게 나온다. 그래도, 단면을 잘랐을 때 생각보다 선명한 무늬가 나와 내심 신기했다(이게 된다고?).
처음 해보는 군생활이기에 이것저것 시행착오를 겪을거다. 실수도 하고 안 좋은 일도 많겠지.
하지만, 꾹 참고 버텨 시간과 경험이 쌓이고 쌓이다보면 언젠가 이 바움쿠헨의 멋있는 결처럼 성장해있지 않을까.
라는 의미를 성공적으로 부여하는 순간이다.
미리 녹여둔 화이트 커버춰 초콜릿을 펴 바른다.
스뎅그릇에 초콜릿을 넣고 중탕시켜서 녹이는데, 이미 한 번 멍때리다가(아닌 새벽에 뜬금없이 빵 만드니까 그렇습니다) 오버쿡해서 태우고 난 뒤 다시 시도한 모습.
어느새 날이 밝았다. 초콜릿을 바르다 보니 어느새 창 밖이 밝다. 내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이제 슬슬 마무리를 해야 한다.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한다.
기울어진 단층으로 보아 한 차례 대규모 습곡작용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겠습니다. 이제 구워진 케이크를 이쁘게 정육면체로 자른다. 깔끔하게 정육면체로 자르지 않으면 몬가 아니 있어보일 수 있기에 신중에 신중을 가한다.
뿌려지는 초록색 가루는 '국가방위의 중심군, 육군'의 상징인 국방색을 의미합니다. 성공적으로 자른 케이크 위에 녹차 파우더를 뿌려준다. 유산지를 이용해 반만 뿌려주면 좀 더 있어보인다.
- Finish -
각도의 중요성
이걸 만든지도 벌써 1년 하고도 4개월이 지났다.
군생활을 앞 둔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글을 쓰다보니 기분이 참 묘하다. 참 막막했고, 끝나긴 할까 싶었다. 그런데 벌써 전역 100일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이날 만든 바움쿠헨에 붙인 의미는 군생활에 있어 내게 적잖은 힘이 되었다.
버티고 버티다보면 그 순간들이 행복이던, 고통이건 모두 내 재산이 되어 지금의 나를 만든다는 의미.
나는 그날 새벽 느꼈던 감정들을 두고두고 떠올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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