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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흔적을 남기는 것에는
    주저리 주저리/사색노트 2020. 6. 18. 02:30

     

     

    저기 풀 숲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리움이 많은 사람이다.

     

    문득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릴 때, 그때의 느낌이 생생하지 않으면 꽤 우울하다. 아무리 당시에 행복했다는 기억이 있더라도 구체적으로 그 날의 촉감, 향기, 느낌과 같은 감각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으면 그 기억은 내게 흑백처럼 다가온다. 향을 잃은 조화처럼. 

     

    그래서 나는 어떤 식으로라도 흔적을 남기려고 한다. 그 흔적을 단서 삼아 생생하게 기억하고 싶으니까. 가령 일기를 쓰거나, 사진을 찍거나, 의미 있는 무언가를 하거나.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나는 이런 것도 했었다.

     

    군대에 입대했을 때 처음 먹었던 식단에 '단감'이 있었다.

    여러 의미에서 끌려온 상태라 갓 입대한 그때의 나는 상당히 센치해진 상태였고, 단감을 먹고 난 뒤 남겨진 씨앗이 유난히 눈에 밟혔다. 그래서 나는 잘려진 단감에서 씨 여섯 개를 미리 빼놓은 뒤, 과육은 먹고 씨앗은 간직했다.

     

    씨앗은 내 일기수첩 안에 안전하게 보관되어 언제나 나를 따라다녔다. 그리고 내 흔적을 따라 심어졌다.

    신병교육을 받았던 논산 막사 앞에 두 알,

    한 달 간 병과교육을 받으러 갔던 전남 장성의 공병학교 폭파 훈련장 뒷산에 두 알, 

    1년 넘게 남은 군생활을 보내게 됐던 운천 부대 풀 숲에 한 알.

     

    마지막 남은 하나는 전역 후 지금까지 가지고 있다.

     

     

    그것은, 처음으로 가족으로부터 떨어진 후 전혀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전역일을 생각하면서

    '전역한 후의 내 모습도 이 씨앗처럼 성장해있었으면 좋겠다'며 의미를 부여한, 나름의 퍼포먼스였다.


    흔적을 남기는 것에는 저마다 이유가 있겠지만ㅡ

    어쩌면 나는 단지 좋았던 그 순간만이 아니라, 행복했던 내 자신이 그리웠던 것일 지도 모르겠다.

    혹은, 꼭 행복하지 않았더라도 그저 지나가버린 세월 순간 순간에 존재했던 '나' 그 자체를 추억하고 싶었던 것일까.

    어떤가, 당신은.


    그 씨앗들은 어떻게 됐을까.

     

    잘 자라 뜨거운 태양 아래서 잎사귀를 활짝 뻗치고 있을까,

    아니면 아직 세상 밖으로 나갈 용기가 없어 기회를 엿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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