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저리 주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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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저리 주저리/사색노트 2020. 8. 4. 02:27
불 꺼진 방, 닫혀있는 방문. 새벽 빛 처럼 푸르스름한 저녁 하늘. 깊은 바닷속 칠흑까지 미처 닿지 못해 오로라처럼 일렁이듯 걸려있는 빛의 잔향처럼 창문으로부터 방 안의 심부로 부드럽게 스며드는 쪽빛 그림자. 월광 아래 모든 것들이 탈색되어 창백히 실루엣으로나마 존재하듯이 방 안은 온통 푸르스름하게, 테두리 없이 단색으로서 우두커니 서있을 뿐이었다. 방문 너머로 가만가만 들려오는 TV소리, 창문 너머로 조금씩 잦아드는 빗소리와 양철 창틀을 두드리는 낙숫물의 금속성 파열음. 노면의 물웅덩이를 가르는 타이어, 멀거니 들려오는 힘겹게 토해내는 듯 한 버스의 배기음. 이미 식어버린, 달곰하니 향긋한 밀크티를 머금고 검푸른 천장의 실루엣을 응시하며 가만히 누워있자니 문득 3평 남짓한 이 공간에서의 순간이 다시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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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다고 해서주저리 주저리/사색노트 2020. 6. 21. 00:19
왜 그리 맘 졸이고 사나. 계획한 것 하나 번듯하게 제대로 하는 일 없고 오지도 않은 내일을 보증 삼아 끊임없이 타협하고. 그래서 그렇게 스스로가 한심했나. 후회하고, 자책하고, 스트레스 받고. 그래, 항상 쫒기듯 살아보니 어떻든. 안 되던 일이 되고, 하는 일이 모두 쉽게 풀리던가. 남들과 너를 끊임없이 비교하며 비난하고 힐난하면 상황이 좀 나아지냔 말이다. 스스로가 그리도 못 마땅한가. 대체 넌 스스로를 뭐라고 생각하길래 잣대가 그렇게 엄격한가. 너도 다른 사람처럼 실수하고, 미루고, 타협하고, 실패하는거다. 남들이 일상 속에서 숱하게 하는 것들을, 도대체 왜 너는 해선 안되나. 그게 그렇게 비난할 일인가. 너는 초인도 아니고, 성자도 아니다. 남들보다 뛰어난 존재 또한 아니다. 너는 그저, 지극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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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을 남기는 것에는주저리 주저리/사색노트 2020. 6. 18. 02:30
나는 그리움이 많은 사람이다. 문득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릴 때, 그때의 느낌이 생생하지 않으면 꽤 우울하다. 아무리 당시에 행복했다는 기억이 있더라도 구체적으로 그 날의 촉감, 향기, 느낌과 같은 감각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으면 그 기억은 내게 흑백처럼 다가온다. 향을 잃은 조화처럼. 그래서 나는 어떤 식으로라도 흔적을 남기려고 한다. 그 흔적을 단서 삼아 생생하게 기억하고 싶으니까. 가령 일기를 쓰거나, 사진을 찍거나, 의미 있는 무언가를 하거나.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나는 이런 것도 했었다. 군대에 입대했을 때 처음 먹었던 식단에 '단감'이 있었다. 여러 의미에서 끌려온 상태라 갓 입대한 그때의 나는 상당히 센치해진 상태였고, 단감을 먹고 난 뒤 남겨진 씨앗이 유난히 눈에 밟혔다. 그래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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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저하는 그대에게주저리 주저리/사색노트 2020. 6. 17. 01:53
누구나 인생은 1회차다. 그 누구도 예고편을 보지 못했고, 연습도 하지 못했으며, 살아갈 세상에 대한 언지 조차 듣지 못했다. 우리는 그저 태어났고, 살아간다. 시간이 되어 저절로 삶의 의미가 찾아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떤 직업을 갖고, 어떤 취미를 즐기며, 어떤 목표로 인생을 살아갈지 때가 되어 알 수 있다면.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런 때란 없다. 그저 시간을 축 삼아 걷고 또 걸으며,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른 채 우리는 끊임없이 선택하고 또 갈등한다. 내가 무엇을 잘 하는지, 무엇을 해야 성공할 지, 무엇을 해야 굶지 않을 지 끊임없이 질문하고 되뇌이지만, 돌아오는 대답 없이 그저 애석한 세월만 흐를 뿐이다. '한 우물을 파라'는 말은 있지만, 망할 놈의 우물은 도대체 어디에 있고, 얼마나 파야 나..